문답

성도님들께서 질문하신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갖고 계시니까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분은 성령님과 하나님인가?

창조가 성부께, 구속이 성자께 돌려지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심은 성령님께 돌려집니다. 하지만 모든 사역이 그러한데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되지 않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도 시간을 초월해 계신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면서 하늘에서 중보하시면서 재림하신 상태인가?

예수님도 시간을 초월해 계신가?

제2위이신 성자께서는 신성(신적 본질)과 인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이를 일위양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성과 인성은 동일시되지 않고 해서도 안됩니다.

성자께서 인성을 따라서는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거니셨을 때에도 여전히 신성을 따라서는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성자께서 인성을 따라서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신성을 따라서는 여전히 고난 받을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두 인격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위격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것이며, 우리로서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가?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은 인성을 따라서는 시간을 초월해 계시지 않지만, 신성을 따라서는 단 한 순간도 시간을 초월해 계시지 않은 적이 없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면서 하늘에서 중보하시면서 재림하신 상태인가?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시고 온 생애 가운데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모든 일은 인성을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난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으며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며 마침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 또한 인성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며 이루어질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따라서는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시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의 모든 사역은 인성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마침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며, 특별히 시간에 대해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선은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영원하신데, 우리는 시간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동일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있어서도 영원하신데, 이는 시간에 대해 초월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시간에 종속되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 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으며, 부족하게나마 표현하자면 과거나 미래가 없는 영원한 현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붙들고 계시며 지탱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나타내고 이루시기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지 않기로 정하신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로 정하신 사람들은 빠지지 않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셨다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원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어짜피 구원받을 사람은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기도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모든 행위(전도, 기도 등)가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믿는 것을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결과 뿐만이 아니라 과정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사람도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 싫다고 그것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럼에도 실패하지 않을테지만,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했던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전도를 사용하셔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렇게 하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전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서 누군가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어떤 역할인가?

먼저 이 질문에는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할 수 있으려면 그 일이 우리에게 달려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우선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에 종 노릇하고 있으며, 진리를 억누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사람의 구원이 자기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하여 구원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이 자기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람의 마음을 꺾고 돌이키게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스스로의 믿음에 반대 되는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은 오히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기도의 동기를 빼앗는 것은 구원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려 드리는 누군가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된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 마음에 비추시기를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구원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